4. 가공(架空) 일왕 일본서기에 기록된 2~9대 왕들의 내용에는 세자책봉, 왕의 즉위와 사망 사실만 적혀 있고 역사적 사실 기록은 전혀 없다. 일본서기는 진무왕(神武王)을 가공시조(架空始祖)로 만든 후 역사적 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짜 왕을 만들어 넣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백제가 신라에 패해 일본열도로 도망간 7세기 후반 즉 40대 텐무(天武) 일왕까지는 부족국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맹 왕으로 조작했으며 표와 같이 재임기간을 고무줄과 같이 늘려놓았다
역 대 |
이 름 |
즉위년도 |
재임기간 |
역대 |
이름 |
즉위년도 |
재임기간 |
1 대 |
진무(神武) |
B.C 660년 |
78년 |
9 대 |
가이카(開化) |
B.C 151년 |
54년 |
2 대 |
스이제이(綏靖) |
B.C 582년 |
33년 |
10 대 |
스진(崇神) |
B.C 97년 |
68년 |
3 대 |
안네이(安寧) |
B.C 549년 |
39년 |
11 대 |
스이(垂仁) |
B.C 29년 |
99년 |
4 대 |
이토쿠(懿德) |
B.C 510년 |
35년 |
12 대 |
게이코오(景行) |
서기 71년 |
60년 |
5 대 |
고오쇼오(孝昭) |
B.C 475년 |
83년 |
13 대 |
세이무(成務) |
서기 131년 |
61년 |
6 대 |
고오안(孝安) |
B.C 392년 |
102년 |
14 대 |
쥬아이(仲哀) |
서기 192년 |
8(78)년 |
7 대 |
고오레이(孝靈) |
B.C 290년 |
76년 |
15 대 |
오오진(應神) |
서기 270년 |
43년 |
8 대 |
고오겐(孝元王) |
B.C 214년 |
63년 |
16 대 |
닌토쿠(仁口) |
서기 313~399 년 |
87년 |
뿐만 아니라 인술과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100세까지 생존하기 어려운데 초대 진무(神武)왕이 127세, 12대 게이코오(景行).16대 닌도쿠(仁德)왕은 14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16대 닌토쿠(仁德) 왕까지 100세 이상 살았다고 하는 왕이 무려 13명이나 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1989년 사망한 124대 히로히토까지 평균 재임 기간을 산정해보면 그 허구성은 분명히 나타난다.
역 대 |
재임기간 |
총재임기간 |
평균재임기간 |
1~ 16대 |
BC660~ 399년 |
1,059년/ 16명 |
66.2년 |
1~ 40대 |
BC660~ 686년 |
1,346년/ 40명 |
33.7년 |
1~ 124대 |
BC660~ 399년 |
2,649년/124명 |
21.4년 |
17~ 124대 |
399 ~ 1989년 |
1,591년/108명 |
14.7년 |
41~ 124대 |
686 ~ 1989년 |
1,304년/ 84명 |
15.5년 |
16대까지 왕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66.2년으로 17대부터 히로히토 왕까지의 재임기간 평균 14.7년과 비교하면 무려 4.5배에 달한다. 그리고 ‘기기’ 작성연대를 40대 텐무일왕을 가정하여 40대를 전후한 왕들의 재임기간을 비교해 보면 평균 2배가 넘는다. 10대까지 평균 재임기간을 한반도 제왕들과 비교해 보면 고구려는 28.5년, 신라 30년, 백제 32년이지만 일본은 평균 63년으로 2배가 넘는다.
그리고 일본왕가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세계 어떤 나라, 어떤 왕실도 족보와 성이 있는데 비해 일본왕가는 히로히토, 아키히토와 같이 이름만 있고 성(姓)과 호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왕실의 계보는 일반인들의 호적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황통보(皇統譜)에 의해 별도로 관리되고 있다. 이것을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역대 수상뿐이고 일반에게는 절대로 공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인가?
성(姓)을 가짐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역성혁명이 두려워서도 아니요, 모든 일본인들의 어버이로 조작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일본왕통이 바로 한반도 후손들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대한 열등감에 대한 반발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반도와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 일본열도를 신국으로, 일본왕들을 신의 아들로 조작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모셨던 히로히토의 본심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들은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2001년 12월 25일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1984년 전두환대통령 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만찬 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스이코(推古 33대 592~628년 재위)일왕 이전 일왕의 역사는 아직 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일왕 중에는 한국과 관련이 있는 분이 일본에 도래하여 그 혈통이 일왕의 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칠지도 조작’ 항에서 언급했지만 스이코는 여왕으로 그녀가 재위했던 시대는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를 비롯한 많은 문물들이 일본열도로 밀려들어 아스카 문화가 지속적으로 화려하게 꽃피우고 있던 시대를 말한다. 이것이 고대 일본열도에 불었던 제1차 한류열풍 ‘구다라 나이(百濟無り:백제것이면 무엇이든 최고다)’ 열풍이다. ‘칠지도 조작’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일본열도에서 가장 세력이 강력했던 호족은 백제계 도래인 소가씨였다. 소가씨는 31대부터 35대까지 일왕을 천거 하는 등 일본열도를 좌지우지했던 최고 실세였다. 그러한 당시의 상황을 깊이 살펴보면 일왕가가 자고로 한반도 특히 백제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일왕은 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존재라 하지만 지금도 유.무형으로 일본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궁내성을 두어 철저히 베일에 쌓인 일왕가는 일본국민들에게 분명 ‘구름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로히토의 이와 같은 말이나 2001년 12월 23일 “칸무 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었다”고 밝힌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들은 일본언론들이 철저히 함구하여 국민들의 알 권리를 차단시켜 왔다. 아사히신문과 같은 일부 언론만이 보도했지만 정치지도자들과 언론들이 만세일계로 포장된 궁성이 행여 무너질세라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일왕가의 탄생 비밀과 이미지는 궁성 담 높이와 같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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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징구왕후(神功王后) 조작
동아시아 역사학계에서는 4세기의 일본역사를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한다. 이 말은 중국 진나라가 건국된 다음해인 266년에 야마타이국 왕 히미코의 뒤를 이은 이요(壹與)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413년 왜5왕(五王)이 사절을 파견하기까지 약 150여 년간 왜의 역사가 중국의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백제가 아직기, 왕인박사 등 수많은 학자들과 백제의 문물을 일본열도로 흘러 보내던 시기이다. 역사의 여명기인 일본열도에 초기 백제 열풍(한류열풍)을 형성하던 시기이다. 즉 백제가 기나이(畿內.나라.오사카.교토)를 중심으로 한 야마토지역에 백제의 후국을 만들고 있던 시절이다.
하지만 조작된 일본서기에서는 4세기의 일본역사가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조작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날까지 일본역사를 실타래처럼 헝클어버린 것이 4세기 역사다. 즉 조작된 일본서기 4세기에 등장하는 인물 징구왕후가 4세기 한반도를 정복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어 통치했다는 것이다. 황국사관에 물든 일본인들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칠지도’와 ‘광개토태왕비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작된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징구왕후는 AD 148년부터 247년까지 100년 동안 살면서 14대 주우아이(仲哀)와 15대 오오진(應神) 일왕 사이에 나오는, 즉 주우아이(仲哀)의 제3부인으로 69년 간 섭정(攝政)을 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부족국가인 야마타이(邪馬台國)국의 왕인 그녀가 당시 강대국이었던 신라와 고구려, 백제, 가야를 싸우지도 않고 정복했다는 애니메이션과 같이 조작된 일본서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징구왕후(神功王后)가 혼자 배에 오르자 풍신(風神)이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海神)이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닷속의 큰 고기들이 다 떠올라 배를 도왔다. 노를 쓸 필요도 없이 곧바로 신라에 당도했다……신라왕은 전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라왕은 두려워 싸울 마음을 잃었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흰 줄을 목에 감고 스스로를 포박하였다. 지도(圖)와 호적(籍)을 바치고 왕선 앞에서 항복하였다. …….왕후가 짚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우고 후세의 표로 하였다. 그 창이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 있다……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쳤다. 이것이 그 연유다. 이에 고구려, 백제 2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조용히 그 군세(軍勢)를 엿보고 있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營外)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금후는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삼한을 직할지(屯倉)로 삼았으며 내관가(內官家)을 정하였다. 이가 소위 삼한이다. 왕후는 신라에서 돌아왔다.
’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시초이다.
그런데 소설과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실제로 믿고 싶어하는 근거는 징구왕후기의 주(註)에 나오는 위지 왜인전의 인용부분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자가 허구성으로 가득 찬 징구왕후기에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히미코와 동일이었다는 것을 넌지시 부각시킴으로써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일본역사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히미코에 관한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07년 왜의 면토국왕(面土國王)이 조공했다. 180년대 왜국에 대란이 일어나 그 난리 속에서 30여 개 소국들의 공립으로 야마타이국의 히미코가 왕이 되었다. 239년 히미코는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하였다. 구나국와 대립하고 있던 히미코는 240년, 243년 위나라에 사자를 보내와 원조를 요청했다.”
이 여인에 대한 이름이 중국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서는 야마타이(邪馬台國)국 여왕 비미호(卑彌呼 :히미코), 삼국유사에는 세오녀(細烏女), 고사기에는 난생녀(卵生女), 김해김씨왕세계에는 신녀(神女), 일본서기에서는 징구왕후(神功王后)로 기록되어 있으며, 생존연대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위지왜인전에는 그녀가 무녀(巫女)로서 그녀의 곁에는 항상 남동생 선견(仙見)왕자가 있어 국사를 보좌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그녀를 김수로왕의 둘째 묘견공주(妙見公主)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가. 하야시 세이고(林靑梧)교수의 저서 <일본서기의 암호>, 사시요시히코(佐治芳彦)의 저술 <야마타이국말살(邪馬台國抹殺)의 미(謎)> 및 많은 일본학자들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 또 히미코가 다스렸던 북규슈 일대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매우 가깝다. 이 지역을 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가라(加羅)라고 불렀던 사실은 야마타이국이 가야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던 가야의 분국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다.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는 <일본국가의 기원>에서 북규슈 일대에서 29개국 5만호를 평정하여 야마타이국의 여왕이 된 묘견공주 히미코가 일본왕가의 전설적인 시조 아라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라. 임진왜란 후 일본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며 일왕 측근의 정치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천신은 실존 인간이며 삼한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마. 북규슈 후쿠오카(福岡)시 하카다구(博多區)에는 징구왕후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 스미요시신사(住吉神社)가 있다. 이 곳의 안내책자에는 ‘신대(神代) 이전에 이 곳에 온 것으로 알려진 징구왕후는 대륙에서 도항해 올 때 용맹스러운 수군을 이끌고 왔으며 신덕(神德)을 갖춘 왕족이었지 않나 추측되며, 따라서 저중표(底中表)라는 三神이 三韓이나 대륙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더욱 분명해 진다. 그리고 스미요시신사(住吉神社) 경내에는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소나무가 무척 많이 우거져 있다. 일본에서는 흔하지 않는 이 나무를 신목(神木)이라 부르고 있다.
바. 묘견공주 히미코가 고대 일본열도에서 강력한 부족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철기문화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에서 밝히고 있지만 5세기까지 일본열도는 철을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철을 생산한 곳이 바로 가야다. 이러한 가야는 가야인인 야마타이국의 묘견공주가 강력한 부족국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많은 철을 지원했다고 볼 수 있다.
징구왕후가 신라정벌 출전 때의 본거지라는 규슈의 오이타현 우사(宇佐)신궁을 답사해 보면 징구왕후의 정벌 과정을 대형 벽화들에 담아 화려하게 설치해 놓고 있다. 우사신궁에는 옛날 천손(天孫)이 강림했다고 하며 일본 전역에 4만여 신사를 거느리는 총본산이다. 각 신사에서는 징구왕후가 신라.가야.백제.고구려를 정복했다는 것을 정설처럼 선전하고 있다. 허구와 괴이한 소설과 같은 기록을 믿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징구왕후는 A.D 247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 구수왕, 침류왕은 징구왕후 보다 훨씬 후대에 존재한 왕들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징구왕후가 그 이후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조작되어 있어 년도가 뒤죽박죽이다. A.D 255년 징구왕후 55년 기록에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근초고왕은 A.D 375년 사망했다. 징구왕후 56년(A.D 256년)기록 구수(근초고)왕 즉위 --실제 A.D 375년 즉위 징구왕후 64년(A.D 264년)기록 구수(근초고)왕 사망 --실제 A.D 384년 사망 징구왕후 65년(A.D 265년)기록 침류왕 사망 --실제 A.D 385년 사망
많은 일본학자들 중에서 특히 미즈노 유(水野祐)는 그의 저서 <일본 고대 국가 형성.1978>에서 15대 오오진(應神)왕이 일본서기에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과 여러 사실들을 종합하여 백제계라고 밝혔다. 일본서기는 이 부분에 대해서 징구왕후가 서기 247년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14대 주우아이(仲哀)의 왕자이자, 서기 390년에 즉위한 15대 오오진을 낳았다고 조작하고 있다. 즉 일본은 만세일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가야계 왜에서 백제계 야마토왜로 넘어가는 약 140년의 공백기를 메우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사료된다. 또 이렇게 조작하자 주우아이(仲哀)왕 사망 후 15개월 만에 오오진이 낳는 결과가 되자 일본서기에서는 징구왕후가 허리에 돌을 감아 10달이 되어도 아이(응신)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여 15개월 만에 낳는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6. 야마토(大和) 조작
메이지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3류 사무라이들이 일본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살인과 죽음의 끝자락으로 몰고 갈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야마토타마시(大和魂)’이다. 아시아침략전쟁 당시에는 일왕 히로히토가 ‘大和魂’이 새겨진 머리띠를 어린 군인들에게 하사하여 이유도 없이 죽음을 강요할 때 사용했다. 경제성장기에는 개인의 욕구를 억제시키고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강요할 때 사용했다. 그러나 야마토라는 단어는 조작으로 점철되어 있고, 조작된 일본역사가 함축되어 있다.
사시요시히코(佐治芳彦)는 <야마타이국말살(邪馬台國抹殺)의 미(謎).1981년 9월>에서 “일제 때 일본은 한국사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역사와 야마타이국에 관련한 역사를 말살,변조하는 것을 최초의 과업으로 삼았다”고 지적했듯이 일본 학자들은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그것은 야마토와 야마타이국의 위치에 따라 역사조작으로 점철된 일본서기를 비롯한 황국사관 전체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야마타이국에 대한 위치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경 왜에는 100여 개의 소국이 있고, 정기적으로 낙랑군에 조공하는 나라도 있었다라고 한다. <후한서><동이전>에는 57년인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에 왜의 나국왕(奴國王)이 조공했고, 책봉관계를 맺어 이에 대한 대가로 광무제(光武帝)가 지금 후쿠오카시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한위나국왕’이라는 인수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국왕 이후 147~189년 후한 시대에 왜국에는 큰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난리 속에서 180년 야마타이국의 히미코가 30여 개의 소국을 지배하는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히미코는 239년 위나라에 사절단을 파견 조공하고 위 황제로부터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하사 받았다.
더욱이 구나국(狗奴國)과 대립하고 있던 히미코는 240년, 243년 연이어 사자를 보내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왜인전> 첫머리에 나와있는 야마타이국의 여정을 살펴보면 구야한국(狗耶韓國),이키(壹岐),마쓰라국(末盧國),이토국(伊都國),나국(奴),후미,도마(投馬)을 거쳐 도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이 지금의 규슈(九州)설과 아스카와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기나이(畿內)설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4세기 기나이를 중심으로 했던 야마토조정이 번성하기 시작했으므로 4세기 이전에 존재하는 야마타이국의 존재 위치를 규슈설을 따르게 되면 야마타이국 시대 뒤에 기나이 세력이 규슈를 정복했다는 주장이 가능하고 기나이설을 따르게 되면 야마타이국이 야마토조정의 전신이었다는 것이 된다.
원래 기나이설의 출발점은 일본서기 징구왕후기의 주(註)에 일부러 <왜인전>을 인용한 데 있다고 한다. 야마토조정이 한반도의 국가들을 복속시켰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징구 왕후인데 허구성이 강한 징구왕후에게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기록에 그와 히미코가 동일 인물이었다는 점을 넌지시 비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야마토 조정이 중국황제에게 조공하여 복속돼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모토오리 노리나가(木居宣長),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규슈설을 주장하면서 만국의 중심인 일본이 중국에 조공해서 신하의 예를 차렸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징구왕후가 사방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점을 이용해서 규슈 지방의 구마소(熊襲) 등이 제멋대로 이름을 위조해 중국에 사자를 보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것은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명확히 하고 일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의 유구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황국사관을 조작하고 있던 학자들이 중국에 복종하는 히미코를 야마토 조정의 역사에서 배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또 규슈설을 취하면 야마토조정의 통일 이전에 별도의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 되어 만세일계에 치명타가 되고, 기나이설을 취하면 일찍부터 야마토조정이 통일했다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야마토조정이 중국왕조에 조공하면서 신하의 나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두 나라의 위치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은 일왕가를 만세일계로 조작하기 위하여 일본서기가 너무나 황당하게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역사의 만세일계를 강조하려는 쪽은 히미코의 존재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왜인전의 가치를 되도록 낮게 보려는 의도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떠한 결론도 못 내리고 있다. 어떠한 결론이 나든 규슈설은 가야인들이 주축이 된 국가라는 것이고, 기나이설은 후에 백제인들이 주축이 된 국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역사를 조작하고 있던 일제는 엉터리 일본서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邪馬臺, 倭, 山門, 大和 등의 글자 모두를 '야마토'로 읽기로 통일하고 훈독이라며 변명하고 있다. 즉 일본열도가 통일된 국가로 조작하기 위하여 같은 발음이라고 조작했다. 이는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모두를 ‘한국’이라고 우기는 격이다. 반면 야마토라는 나라를 일본이 사용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에서 BC 7세기부터 ‘일본’이 건국되었다고 기록한 것이 조작되었음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천신이 일본에 내려온 곳이 이즈모(出雲)와 츠쿠시(筑紫; 지금의 후쿠오카) 두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초대왕 진무(神武)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했다는 동정설(東征說)과 연관 지어 보면 이는 천신 즉 가야계 사람이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의 규슈 츠쿠시를 지나 기나이로 차츰 세력을 확대해 갔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요이문화 후기에 한인에 의하여 쌀농사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가 북규슈에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한국인이다"라고 말한 것과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우에다(上田正昭), 에가미(江上波夫) 등이
“일본 왕실의 조상이 한반도 가야계였다”는 주장들은 규슈설이 보다 분명해 진다.
이에 대해 미즈노 유(水野祐),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등은 “남한에서 일본 북규슈에 강림할 때에는 니니기이고, 천신(외래민족)이 조선에서 북규슈로 이동할 때(제1회 왜국 건국)의 주역이 스진이라면 북규슈에서 기나이로 진출할 때(제2회 왜국 건국)의 주역은 오오진(應神")이라고 추정했다.
7. 기 타 초대 진무왕의 전설을 살펴보면 ‘그가 치쿠시(筑紫)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지나게 되었을 때 얕고 물살이 센 곳에 이르러 길을 잃었는데, 거북의 등에 탄 국신(國神)이 나타나서 길을 안내해 항해를 무사히 계속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주몽이 부여국을 도망치려고 할 때 시엄수(施掩水)라는 강이 앞을 가로막아 건너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라들이 나타나 다리가 돼주어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라는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이야기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40대 텐무(天武)의 기록은 고구려 연개소문, 42대 몬무(文武)의 기록은 신라 문무대왕의 기록과 너무 비슷하여 동일인 설이 나올 정도다.
그리고 역사가가 집필했다고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다. 40대 텐무왕기에는 사무적인 기록 위주로 엮어져 있는 반면 제14대 주우아이(仲哀)왕기에는 텐무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 전말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다. 또 텐무 왕비에 관하여는 징구왕후기에 기록되어 있다. 42대 몬무왕 이야기는 제15대 오오진과 제22대 세이네이(淸寧)왕기에, 제38대 텐지(天智) 이야기는 제12대 게이코오(景行)왕기에 기록되어 있고, 제36대 고오토쿠(孝德)왕 이야기는 제19대 인교오(允恭)왕기에 각각 나뉘어져 실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