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박정희 前대통령이 진짜로 친일파였습니까?

 

 

인터넷에서 돌아다녀보면 온통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 ,다카키 마사오 일본의 충성했다 ,일제시대때 우리나라 독립투사를 때려잡았다는등... 이런식에 자료들이 많은데 이 자료들이 사실일까요? 아니면 아무근거도없는 추측성의 유언비어일가요? 몇달전부터 계속 박정희 현판철거하고 김구선생님의 현판으로 다시 달아야한다는등... 아주 사회적인 파장이 시끄러운것같은데 진짜로 박정희 前대통령이 친일파였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그냥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다니기만 한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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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라는 검색만 해봐도 백과사전에서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데 질문을 하다니요...

그의 변절역사는 유튜브에 아주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 많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중심인물이기도 하지만 민족정신을 훼손한 주역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인물에게는 공이 있고 과가 있지만... 주관적 판단의 기준은 역사를 잘 알고 해야지요.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를 칭송하지만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은 그를 칭송하지 않습니다.

질문하신 님도 참고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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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이나 내용이 잘 정리되어 올립니다,

 

 

[박정희의 모든 것]

 

한마디로

  

젊은 여자들 옆에 끼고 술 퍼마시다

 

자신의 수족에게 총 맞아 죽은 놈이다. 

 

 

 

일본 극우파 인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가

“고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유럽 선진국의 아시아 식민통치에 비해 일본이 한 것은

오히려 부드러웠고 공평했다고 말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그는 영국 기자가

 “한국 언론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 당시 잔혹행위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도쿄는 올림픽 개최지가 돼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며 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일본의) 한국 통치가 모두 정당했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유럽 선진국의 아시아 식민통치에 비해 일본이 한 것은 오히려 부드러웠고 공평했다고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주장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

 

              구체적 친일 행적 열 가지


[ 들어가는 말 ]

얼마전 3,1절 83돌을 맞이하여 '광복회'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709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였다. 당시 전략적 차원으로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박정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한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친일파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친일분자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이다. 친일부역의 정도에 따라서 A급, B급, C급 등으로 나눈다면 박정희에게는 A급으로는 부족하여 특급 친일파(A+)로 분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저질적인 친일파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18년간이나 철저한 인권유린에 바탕을 둔 군사파쇼로 통치를 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휼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역사학자나 경제전문가들에게서 긍적적인 평가의 대상조차 되기 힘든 박정희가 대중들에게 휼륭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분위기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며 그 문제점과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역류시키고자 글을 올린다.

그 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글을 몇 편 올렸지만("너(박정희)의 가면을 벗겨주마 1∼8편" 등) 구체적 친일행적에 대한 글은 올리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친일분자가 우리의 대통령으로써 18년간이나 통치하였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겨울공화국 같은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의 죄상을 묻지 않아도 친일행적 하나만으로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 죄인이다.

'변신의 황제'였던 그는 결국 한반도 남쪽에 일본도 흉내만 내다만 천황주의를 완성하였다. 즉, 다카키 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반전술, 변장술, 위장술, 둔갑술 등을 이용하여 천황주의를 완성하고 진짜천황이 되었는데 그 과정은 역겨운 구토물 속에서 이루어졌다. 

                                                          보라!

 

 




교사에서 군인으로---

 

조선청년에서 일본군 장교로---

 

박정희에서 다카키 마사오로---

 

다카키 마사오에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오카모토 미누루에서 다시 박정희로---

 

일본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장교로---

 

'빨갱이' 무기수에서 반공의 기수로---

 

충성스런 장성에서 군사반란 두목으로---

 

육군 대장에서 대통령으로---

박정희는 극과 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으며--

 

그에게는 조국과 민족도, 적과 동지도, 양심과 이념도 단지 '권력의 디딤돌'이었을 뿐이다.

 



-. 민족과 반민족, 정의와 불의 따위 구분은 깡그리 무시하였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 아무리 반민족이고 불의라도 권력으로 통하는 길만 보이면 돌진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 기회주의는 그의 처세술이고 천황주의는 그의 사상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제 그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다.





[ 내용 ]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혈서(최우수 제국군인)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자진해서 만주군관학교 생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15등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 덕에 영광의 얼굴로 [만주일보]에 실린다. 뿐만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자원해서 들어가는 상황을 좀더 살펴보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즉, 나이 때문에 자격 미달이었는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적을 고쳐서 나이를 낮췄다고 한다.

또한 나이를 낮췄다고 멀쩡한 조선인이 군관학교/사관학교에 입학하기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원검증과 사상검증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어떻게 하면 신원검증과 사상검증에서 인정을 받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동료교사 유증선이 아이디어를 내주었는데 "박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하며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찬동했다.

나이도, 신원검증도, 사상검증의 장애물을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충성혈서는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아니 일제를 감동 시켜 당시의 언론에(만주일보) 대서 특필 되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교사의 신분으로 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자원 입대하는 것은 천하제일의 기회주의자로 출발하는 신호탄이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온갖 방법을 다 써가며 자기를 지우려했던 어머니와의 출생전쟁에서 승리하여 '죽음의 집' 같았던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탈출하였고

다시 가난한 집과 고향으로부터 탈출하여 황국신민교육의 첨병 대구사범학교로 탈출하고...

다시 사무라이정신으로 무장한 일본군장교 양성기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탈출하여 '신민지 조선'을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천황주의자의 신봉자가 되어 '조센징 토벌'에 몸과 마음을 바쳐 젊음을 불태우게 된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 JS표 일본인 준비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주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 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이 만주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 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된다. 한 마디로 황군들이 나라 조지고 민족정기 좀 먹는 세력이 된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지도했던 한 일본인 장교의 말을 들어보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철투철미 하게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하였나를 알 수 있다.

[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박정희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라고 진술하고 있다.




③ 완전한 일본인 - JS표 일본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키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JS(Japanese Standard)표 [일제인]이라는 말인 것이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미안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이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자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말없는 사나이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발작일까? 기적일까? 어느 쪽이든 '조센징 토벌'이란 명령을 받으면 자기도 가눌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요오시'란 말은 우리말 '좋다'와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요오시'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오시(좋다)! 토벌이다."라고 고함을 지러대는 행동에는 "조센징을 반드시 내 손으로 때려잡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강렬한 의지와 충성심에 불타는 "조센징(독립군) 토벌"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 지원 입대...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누구인가 변신의 천재가 아닌가? 절망도 잠시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박정희가 좌파가 되는 행동에 대하여 조갑제 등은 형(박상희)의 죽음과 연관 시킨다. 그 충격으로 좌파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주장이다. 박정희는 다만 유리한 상황에 편승한것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당시 한반도 상황은 미국 정보의 데이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반도는 온통 붉은색(좌파)으로 뒤덮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러한 권력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지 간파하고 그것에 편승했을 뿐이다.

하여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자기 혼자 살아 남자고 천명이 넘는 동지들을 저승길로 보내고 살아 남았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다. 어쩌면 한반도 남쪽을 반공으로 도배하는 길만이 자기의 과거를(황군/좌익 등) 은폐하고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기회주의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속성이 이런데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쥐새끼 마냥 살아 남으려고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정말 구토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하지만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리가 남아있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박정희의 창씨 개명은 여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사람보다 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미친 인간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답 : 일본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답 : 일본

-.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답 : 한·일 교섭의 재개.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 맺는 말 ]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 청년에겐 4가지의 길이 있었다. 물론 더욱 세분하여 분류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최상천씨가 제시한 4가지의 길을 소개한다.

첫째 :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투쟁하는 대의(大義)의 길을 가는 것.
둘째 : 개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은 듯이 살아가는 침묵의 길을 가는 것.
셋째 : 조선총독부의 들러리가 되어서 개인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소아(小我)의 길을 가는 것.
넷째 : 일본군국주의를 숭배하고 그 전위대가 되는 사냥개의 길을 가는 것.


식민지 청년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위에서 살펴 본 봐와 같이 네 번째 '사냥개의 길'를 선택했다. 그것도 무서운 집념과 실천력을 가지고 철저하게 일본의 사냥개 노릇을 하였다. 참고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첫 번째의 길을 선택하고 일본에 맞서다가 감옥을 수 차례 드나들었다.

어떤가? 이러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신궁을(기념관) 지어줄 것인가?

집권시절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 등의 죄악을 묻지 않아도.... 친일 행위 하나만으로 기념관은 불가하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친일파는 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죽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민족은 일제에서 해방되었지만 민족의 정기는 바로 서지 못했다. 모두 친일 세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일파가 대통령을 하고.... 국무총리를 하고.... 각 부서의 장관을 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자본가가 되고...

역사에서 친일파는 승리자라는 공식을 우리는 언제까지 만들어 주며 보아줄 것인가? 자신들의 죄과를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하지 않고 죽어가며 이제 그들의 죄상까지 죽어가고(묻히고)있다.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친일 행위는 반드시 그에 응당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 친일파로써 가장 성공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죽어서까지 영화를 누리고 있다.

근대화의 아버지.... 경제성장.... 운운하며 일본군인의 기념관을 자랑스럽게... 서울 한복판에.... 현직의 대통령과.... 정부가 주도하여.... 기념관을 지으려고 한다. 역대 대통령 기념관도 아닌 '다카키 신궁'을 짓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나간 일이며 미친 짓이다.

다카키 신궁이 완공되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일본이 신사참배를 하며 천황을 기리듯이 '다카키 신궁'에 머리를 조아리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정부에게 요구한다.

[ 살인마 전두환/노태우의 기념관도 지어달라. 이들의 기념관을 짓지 못하겠다면 현재 도둑 건설 중인 다카키 신궁(박정희 기념관)을 폭파시켜라! ]


2002년 6월에

 

[추신 : 2008년 현재 박정희기념관 건립사업은 국고보조금 200억은 집행되었고, 500억의 국민성금이 걷히지 않아 사업은 답보상태라고 합니다.]

 

 

 

 

 

[보도자료]

 

박 前대통령 거쳐 간 여성 200여명"


前 김재규측 변호인 "웬만한 일류 연예인들은 전부 불려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인이었던 안동일(65) 변호사는 "궁정동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을 거쳐 간 여성이 200명쯤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펴낸 '10·26은 아직도 살아있다'라는 책에서 박 전 대통령의 여자 관계를 폭로했다.

 

그는 김재규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1980년 2월19일 접견에서 박 전대통령의 여성편력에 대해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박 전 대통령에게 다 불려갔으며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의 소문도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전 중정 안가 관리직원은 중정이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 2명을 활용해 200여명의 여성 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발을 드는 여성을 선택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올 초 한겨레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 같이 밝히고 "접대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다. 대통령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대통령이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라며 "대통령이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1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면서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도자료]

 

"73년 중앙정보부, 야쿠자 통한 DJ 살해 검토"




박정희 대통령 통치 시절 한국 정부가 일본의 야쿠자 조직을 통해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암살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보도했습니다.

교도 통신은 한국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김 전 대통령이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되기 전에 야쿠자 조직에 의뢰해 살해할 계획을 검토했지만, 성공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한국으로 납치하는 쪽으로 결정했다고 전했습니다.

교도통신은 중앙정보부에 재직했던 한 직원이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이같이 증언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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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혈서 쓰고 만주군에 들어갔다는 1939년판신문기사.

박정희 빠들은 이것도 조작이라고 할것임.

원본은 일본국회도서관에....

 

 

 

 

만주일보 1942. 3. 24' : "다까끼 마사오(박정희) 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 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즉, 나이 때문에 자 격 미달이었는데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호적을 고쳐서 나이 를 낮췄다고 한다. 또한 나이를 낮췄다고 멀쩡 한 조선인이 군관학교/사관학교에 입학하기 란 쉽지 않았다....." 라고 기사가 나온다. '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 이 것은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 후 조센징이라는 신분적인 결함을 피하기 위해 일본 천왕에게 충성 혈서맹세를 하며 썼던 내 용이다.

일본 천왕에게 충성혈서 맹세를 한 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일본인 포함하여 박정희 가 유일하다
또한 그는 그 혈서를 통해 일본군 장교가 되었 고, 만주국의 독립군토벌 특수부대 소위가 되 어 독립군을 토벌했는데, 그의 동기인 한 일본 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특이했다. 독립군이 라는 말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야 지 가야지'를 외쳤다고 한다.

항일의사님들이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할 때 그는 오히려 그 의사님들을 토벌했으니 그 하나만으로도 그의 죄는 씻을 수 없는 것이라 고 할만하다.

그것 뿐이랴? 그는 처음 창씨개명한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에서 조센징 냄새가 난다면서 '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다시 한 번 창씨개명한 다.

'오카모토 미노루'기 누구인지 아는가? 그는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유명한 일본 낭인 두목이다. 과연 박정희는 그를 모르고 그 의 이름으로 창씨개명했을까?
그는 그후 광복이 되자 잠깐 좌익으로 변신하 여 조선남로당 군책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반 공을 세운 최초의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그가 과거 이런 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들은 과 연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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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주의자로 조선에서 초등교사하다가 일본에대한 넘쳐나는 충성심으로 혈써를 써보내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고 일본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까지되었죠.

 이 기록은 현재 일본국회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림으로 일본침몰전까지 보관되어있습니다.

만주군이 되어 독립군 때려잡는 일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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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냥 일본 육사에 다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사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육사에 가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당시 박정희는 대구에서 소학교 교사였는데 나이때문에 도저히 일본육사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지요. 그래서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합니다. 거기서도 일본육사 진학에 대한 미련을 접지못했지요. 일본에 충성해서 출세하고픈 욕망이 얼마나 강했던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바치겠다는 혈서까지 쓰면서 일본육사에 진학합니다. 

그리고 졸업해서 만주에서 독립군 때려잡는데 앞장을 서죠. 이런 점을 볼 때 박정희는 친일파 가운데서도 골수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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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경제대통령도 아닙니다.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는데 힘을 모아준 정난공신들에게 많은 토지, 노비, 금은보화등 부를 주었고, 역모죄 이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게 했습니다. 무법천지에 산거죠. 대대 손손 영원히 말입니다. 그들을 훈구파라고 합니다. 특권층이 생긴거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게 도와준 이들도 훈구파 처럼 대접을 받았습니다.

일부 기업만 대기업으로 성장시킨게 그런 맥락이죠. 노동자들은 착취하고 일부 기업들과 정경유착해서....

지금 봐도 돈많은 사람들은 법망을 잘 피해 다닙니다. 다 봐주는거죠.

유병언만 봐도 그런 사람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벌은 받지않고 다시 부를 축적하니...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

어쨌든 발전한 경제가 있었다면 그것도 박정희가 한것이 아니가 미국이 해준겁니다. 박정희 하도 답답하게 일하니까, 북한한테 먹힐까봐 할 수 없이 미국이 도와준건데, 지가 한것처럼 꾸민거죠.

저는 정말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학교 다닐때 공부도 못해서 역사도 깜깜. 생각해보면 의도적으로 정치교과사 역사교과서 재미없게 만드는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유신, 유신시대 하는데 그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안좋은 건가보다 했죠.

근데 얼마전 박정희가 헌법을 고처 만들었다는 유신헌법에 대해 알고 헉! 했습니다. 그런 사람의 딸이 대통령이라니.

그것도 부정으로 대통령이 됐는데 나라가 잘 돌아갈리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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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해방후부터 현재까지 울나라를 지배해온 세력 자체가 친일파이고 정치 경제 문화등 모든 범위에서 그들의 후손들이 행세해온게 사실입니다.

 

박통은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며 과거 자기출세와 야심을 위해 여기저기 붙어가며 교활한 정치능력을 발휘해 차마 말로 다못할 비극들을 연출해온 장본인이지요.

 

이는 역사적 비극에서 비롯되엇는데 미국이 남한을 지배하면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는 야심이 엄청 큰 인물이었고 시대가 그렇게 잔인하고 무지하였기때문에 통했었지요.

 

아이어니는 친일파가 민족주의자로 둔갑하는게 얼마든 가능한 복잡한 사연들이었습니다. 그도 대단히 복잡한 인물이지요. 사필귀정이라고 마감도 그렇게 간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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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걸 물으시니 어린분인가 보군요.

어른들이 거짓말만 가르치니 이런말이 나오지요.

 

한국현대사 책 사서 읽어보세요(최근간).

아니면 네이버에서 친일 박정희 검색하면 많이 나올거에요.

 

저도 고등학교까지 배운것이 모두 역사적 사실인줄 알았답니다.

대학가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알 수 있어요.

 

부끄럽지만.

우리나라는 친일파로 채워진 건국을 시작했지요.

그래서 그토록 오랬동안 북한과 정통성 논쟁을 해온 것이구요.

 

박정희때 헌법에는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말도 없었지요.

상해임시정부의 돈을 횡령해먹은 친미파인 이승만,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했지요.이완용은 있는나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팔아먹으려 했으니요)

친일파인 박정희가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지요.

 

 

요약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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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일본명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 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며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정희는 다시 한 번 창씨를 개명하게 되는데 새로 개명한 창씨에서 그의 적극적 친일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가 새로 개명한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인데 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 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 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 흔적으로서 박정희의 이 두 번째 창씨 개명 때문에 그는 더욱 '황국신민'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적극적 친일파로 분류되는 것이다.

 

 

당시에 다 창씨개명을 했지만.

더욱더 일본사람이 되고 싶었던 박정희는 제대로 황국신민이 되고싶어했습니다.

이름도 한번더 골라서.

 

게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일본육사를 거치며

독립군 토벌에 앞장섭니다.

 

해방이 된후.

 

공산당에 입당 활동하지요.

그러다 분위기가 소련보다는 미국인것을 재빨리 간파.

 

동지 명부를 들고 이승만과 미국을 찾아가지요.

 

배신의 공로로 권력에 입성시작.

 

그뒤 그 권력에의 욕망은 결국 5.16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뒤 우리사회는 비뚤어진 길을 걷지요.

 

한국현대사가 비뚤어진 것은 결국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게 맞습니다.

 

 

그리고 이회창씨 아버지는 검사보였나 그랬을 겁니다.

일본 검사 밑에서 일하는 일본 검찰 직원이었지요.

범법자를 색출하고 기소하는 일을 맡았으니.

당연 공안사범인 독립군들 때려잡는 일을 맡았을 것이지요.

 

그후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검찰에서 검사역을 맡게 된것으로 압니다.

 

당시 일본에 적극 동조한 세력을 친일파로 보자면.

박정희나 이회창의 부친은 정확히 친일파로 보면 맞습니다.

 

  

 

오히려 김일성은 박정희가 일본 관동군으로 독립군 때려잡고 있을때

항일 무장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선 그렇게 안배웠지요?)

이 역사적 사실이 국사책에 등장하기까지 무려 50년이 넘게 걸립니다.

고등학교 국사책까지엔 나오지도 않지요.

 

저도 학교에서는 김일성이 항일무장활동을 했다는 새빨건 거짓말을 북한 어린이들은 배운다고 해서 어렸을때 북한 어린이들을 불쌍히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실은 우리가 불쌍한 어린이였지요.

교과서에서 거짓말만 가르쳤으니..

당시 교과서에서 박정희 전두환을 어찌나 찬양했던지...

 

제대로 된건 대학 와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친일 문제는..

그리고 해방후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한 반면

남쪽은 그렇지 못했지요.

 

이런 부분들이 정통성 논쟁에 불을 붙입니다.

그러면서 외교에 무지 많은 공을 들이게 됩니다.

남이나 북이나 서로 자기가 정통성이 있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오히려 1960년대 까지는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더 인정받고 있었지요.

우리는 미국의 괴뢰정권 정도로 알려져 있어서 외교관계국 수도 북한 보다 더 적었던 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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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만주군관학교출신으로 만주군관학교에 갈때 천황에 대한 맹세의 혈서를 썼으며, 자진하여 정일권, 장도영, 백선엽등과 함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자발적으로 입대할 만큼 대표적인 친일파이며,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좌익계의 독립운동가입니다.

 

박정희 본인은 평생 동안 박상희를 존경하였으며,

황태성간섭사건의  황태성은 박상희의 친구이자 좌익계로

 박상희와 같이 남한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했읍니다.

 

또한 더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은 해방 이후 군부내의 사회주의 숙군 숙청시에 박정희가 자기만 살자고 군부네의 사회주의 조직도를 제공하여 본인만 살았고 나머지 군인들은 죽었읍니다.

 

그래서 미국은 자기만 살자고 동료들을 팔아먹은 박정희를 '스네이크 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한 군에 다시 복원되었을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놈이 장도영입니다.

 

장도영 또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박정희 1기 선배입니다.

(참고, 전 국무총리 최규화는 만주 협회회 출신으로 같은 친일파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5.16군사반란시에 지들끼리 잘 잘못을 따지고 그럽니다. 참 한심합니다.

 

그리고, 만주군관학교에서는  '첸노반사이' 천황폐하만세를 아칩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부르면서 정신교육을 철저히 받고 그랬답니다.

 

다시는 이러한 매국을 하고 대중을 수탈하면서 한 시대를 지배하려는 쓰레기같은 놈들이 추앙받고 긍정적인 역사 평가를 받지 못하도록 우리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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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들을 보다가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에 충성을 하였던듯 합니다.

지금까지 80년대에서 90년대 배워온 바와는 다르지만, 

요사이 이야기되는 혈서라든가 기타 등등 보게 되면서

당시의 일제 점령기 상태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살기 위해서 일본군에 자원하였을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이랑은 비교도 안되지요... 조국을 버렸으니깐요..)

 

아직도 우리나라는 결과 우선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렇다 보니 전 대통령에 새마을 운동,

경부고속도로 같은과업을 이뤄낸부분만  이야기 되었고, 그전 이야기는 없는듯 합니다.

끝에는 우리나라를 발전도 시키고 하였지만, 

처음에는 친일파를 계기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역사가 판단한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지금이나마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자의든 타의든 일본을 위해 논설을 쓰고, 노래를 짓고, 일본을 찬양하였던 기타 등등 사람들은

그 명단에는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점심에 TV를 보니 일제 강정기에 젋은 나이에 탄광에 끌려 가셔서 일하다가 오신분은

1년에 80만원만  정부에서 지급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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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진짜 얼굴은?(1)
전 언론인, 플로리다자연치유연구원원장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 하면, 웬만한 지식층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조국의 경제를 살린 위대한 영웅’, ‘민주국가를 쿠데타로 전복한 반란군 수괴’, ‘ 권력을 악용해 수많은 정적을 없애고 유부녀를 포함한 수백 명 부녀자들을 농락한 희대의 바람둥이 독재자’, ‘최고 악질 친일파’, ‘골수 공산주의자’, 등 완전히 색다른 모습의 얼굴로 혼란스러울 정도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압력과 자사 이익에 눈이 멀어 시녀 노릇을 자임해 왔던 조선 중앙 동아 및 KBS MBC 그리고 일부 인사들의 저서 등의 어용언론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릴 언론 본연의 자세’는 팽개치고 군사독재정권의 요구대로 대부분의 국민들을 ‘바보’로 세뇌시킨 결과, 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위 사실 중 맨 첫 부분, 즉 ‘조국의 경제를 살린 영웅’ 이외의 사실은 믿으려 하지 않는 서글픈 세태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재작년에 어느 여론 조사 기관이 국내의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공무원 대상 여론 조사에서 ‘어느 신문을 가장 신뢰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겨레’, 그 다음이 ‘경향’, ‘한국’의 순서였음은 독자가 가장 많다는 ‘조’ ‘중’ ‘동’이 신뢰 면에서는 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국가기록원’, ‘민족문제연구소’, ‘미군정 정보보고서’, ‘전 미국여기자협회장이오, 한국인으로서는 맨 처음 백악관을 출입한 문명자(1930~2008) 원로 기자의 저서 ’내가본 박정희와 김대중‘ 등을 참고, 위의 어용 언론만 접하고 있는 대다수 인사들의 올바른 정세 판단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 박 전 대통령의 ’진짜 얼굴‘을 서툰 솜씨로나마 있는 그대로 그려 보려 한다.
1939 3월 경북 문경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당시 23, 일본 명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교사는 나이가 많아서(20세까지만 가능) 일본군 만주 신경군관학교(2년제)에 입학이 어렵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 "충성을 다해 일본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 국가를 받들겠다."며 일왕에게 바치는 충성혈서(忠誠血書)를 써서 만주신경군관학교로 보내 입학 허가를 받아냈고 졸업식 때 수석 졸업자 연설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성공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사쿠라처럼 죽겠다”고 강조했는데 일제 하 36년 간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지망생 중 혈서로 일왕에 맹세한 경우는 ‘다카키 마사오’ 교사가 유일무이한 경우다.
만주신경군관학교에서 3등 안으로 졸업한 생도들에게 일본 정규 육사 편입 특전을 줌에 따라 일본육사 3년생으로 편입한 ‘다카키 마사오’ 소위는 졸업 후 관동군 23사단 72연대 소대장이 된다. 그 때까지도 자신의 이름에 불만이 많던 ‘다카키 마사오’ 소위는 당시 일본 연대장 오카모토(대좌=대령)의 성을 본 따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또 다시 개명한다. 조선인(조센징)이 창씨 개명한 냄새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왔고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 보다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가 창씨개명을 의심받지 않은 진짜 일본 이름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한국인의 흔적을 지워보려는 몸부림이었으니 진짜 친일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주에 주둔 중 ‘오카모토 미노루‘ 소위는 소대장으로 독립군(당시 중공 팔로군 소속) 소탕 작전에 무려 110회나 출전, 혁혁한 공로로 중위로 진급한다. 그 후 악질 친일파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간도토벌대’에 소속돼 중대장으로 더욱 큰 공을 세웠으니 그로 인한 애국지사들의 희생은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때 조센징 중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에 사살당한 독립군 전사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이 민족반역자!’하고 절규하지 않았을까?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장군은 “다카키 마사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그의 의심할 수 없는 친일 자세를 극찬한바 있다.
조선,동아,경향,MBC의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했던 문명자 기자가 1972년 도쿄에서 어렵게 ‘다카키 마사오’와 함께 만주신경군관학교에서 생도로 있던 일본인 장교 출신 두 명을 찾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조센징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우뢰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냐?’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고 회고 했다.
문기자는 그 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KCIA(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도쿄에서 정적 김대중을 납치해 동해바다에 수장하기 직전 헬리콥터로 급거 출동한 주한 미정보요원의 제지로 살해 계획이 실패한 후부터 철저한 ‘반 박정희’ 노선으로 선회, 백악관에 보고된 자료를 토대로 박 정권의 각종 비리와 인권유린 관련 기사를 낱낱이 폭로, 조국의 민주화를 적극 지원, 국내 언론을 무색하게 했으며 박정권이 없애버려야 할 ‘반한인사 제1호’가 된다.
그 후 문 기자는 박 정권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부모 친척의 장례식마저 참석할 수 없었다. 이 때 조선일보로 송고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굵직굵직한 박정권의 부정 비리 기사들은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그 기사를 미끼로 조선일보 사장은 청와대에서 계속 두둑한 사례를 받는 결과를 초래했기에 소속 언론사를 자꾸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당시의 국제 거물인 중국의 뎅샤오핑을 비롯해 북한의 김일성 등과 단독 인터뷰를 했던 문 기자는 박정권이 자신을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로 낙인찍는데 대해 “유신정권 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 말 남북고위급(김대중 김일성) 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 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더라. ‘반한인사’ ‘친북인사’란 한국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반()박정희인사’나 ‘반()유신인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친북’도 그렇다. 남북은 같은 민족이다. 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 해야 한다...” 고 받아쳤던 정의감과 패기로 가득 찬 원로 기자였다.
(계속) kajhc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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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껀인정해야지요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룩한 위대한분 맞죠

그러나

친일파 맞습니다. 육사출신으로 만주에서 장교근무확실히 했습니다.

이사실은 객관적 자료로서 충분합니다.

그리고 만주는 독립군이 활동하던지역이지요

그러니 그곳에 일본군장교는 당연히 독립군과 싸웠겠죠. 당연한 이야기죠

여기까진 덮어줄만하죠

이후 독립후에는 남로당원(공산당)으로 활동하다 적발되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겄도 군인의 신분으로 말이죠

박정희가의 형제들 대부분이 빨갱이 활동을 하다 폭등을 일으켜 죽기도하고 월북도하고 했답니다. 사형선고를 받지만 친일장교들에 의해 사형을 면하게되고 전쟁이터지자 다시 장교로 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전쟁후에는 구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죠 그게 516군사 구테타입니다. 그리고는 민주주의의 수호자인양 .....그러나 그는 독재자이었습니다.

그의 공적만을 강조하면 이런사실이 가려집니다.

 

일제시대는 일본군장교로 일본에 충성하고

독립후엔 공산당이 강하게 보이자 공산활동(요즘말하는 빨갱이)

전쟁이터지고 미군이 들어오자 이때부턴 민주주의 수호자.... 

그러나 독재자

한편으로 산업화의 영웅... 화려하죠

즉 한마디로 말하면 간에 붙었다 쓸개에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 였다는것입니다.

왜 주위에서 박정희 욕하는지 이제 이해 하시겠습니까?

 

박정희를 욕하자는게 아니고  사실을 이야기하는것뿐입니다.

이런 사실은 결국 우리역사의 부끄러운부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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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쓰는 것 보다 그냥 아래 영상 보시면 확인 가능하십니다.

 

이외에도 역사적인 자료는 많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삶을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이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이니까요.

 

http://youtu.be/z-up2VNU8eo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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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하고 적나라한 박정희에 대해 아시려면

팟케스트 '라디오 반민특위' 14회,16회 들어보시길

역사학자가 일반인들도 모르는 디테일한 부분까지 설명함

그거 들으면 박정희에 대해 학을 띠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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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실입니다.

박정희에 미화된 부분이 많은 데  사실이 아닙니다

좀 더 정확한걸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민족문화역사100년 이라는 동영상 이 있는데  이승만  박정희에 관한 내용이 담긴 내용입니다...

두 인간 똑같은 쓰레기들이구요

방법이 거의 유사합니다.

이승만은  독립군 운동하는 척 하며 하와이에서 그들의 돈을 탕진해가면서 자기 탐욕을 채웠고

박정희는 일본 충성혈서로 일본에 충성을 다짐하고 다카키마사오 라는 이름으로 독립군을 잡은데 높은 공을 세운 짐승입니다

그뒤로 해방되면서  북한공산군에 간첩노릇을하고 붙잡히면서 동료들 팔아넘기면서 지 목숨 부지하고 그런다 이승만 4.19 혁명으로 (이때 김주열열사 17세 이 아이로 인해 모든 국민이 초중고 국민 교수까지 반란이 일어나지요)쫒겨나면서  모두 민주주의 실현이 눈앞에 있었을때  박정희놈이  구데타을 일으켜  양민을 죽이고 당시 집권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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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답답하군요 과거 일은 잘 모르겠으면 현재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는 무리 들이 주장하는걸 들어보세요 안병직이나 뉴라이트 등에서 주장하는걸 보면 독도는 일본땅 위안부는 자발적 일본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 . . 친일파가 아니라면 이런 주장을 할수 있을까요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 주장을 하는 무리들은 전부 친일파 .... 이걸 설명할수 있나요 그리고 그 모든걸 떠나서 어떤 업적도 사람의 생명보다 우선 할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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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평범한 범부로 살았다면, 일본 육사에 다닌 것이 무순 대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일국에 대통령을 했습니다.

그것도 정당성 없이 구테타로,

이것 하나만으로도 박정희는 민족에 지도자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이나, 박정희가 아닌 김구선생이나, 장준하 선생이 같은 기간 동안 대통령이었다면,

친일파가 득세하진 못했을 것이고,

오늘 날과 같은 남남 갈등이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까지 북한에 김씨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남북이 이렇게 오랜 세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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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보니까 이 질문의 의도는 박정희 친일에 면죄부를 씌워주기 위한 유치한 의도가 보이네요~~

심지어 일본육사도 만주군관학교 에서 그냥 유람간거처럼~ 풉!!
만주는 일본 관동군이 세운 괴뢰 정부죠..
누가 만주를 별개의 독립국이라고 할 수있나요?

당시 만주에 독립군이 없었다는 둥~~
소설을 쓰고 있네요~

친일은 악질 친일,적극적 친일,소극적 친일,순종,반일, 독립운동등 적극적 반일등으로 분류되겠죠?
박정희는 어디에 속할까요?

소극적,또는 적극적 친일이겠죠~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 하러 다녔다는 증언도 있고,또 아니라는 반론도 있죠^

어쨋든, 박정희는 친일은 분명합니다?
적극적이든,소극적이든~~

그후에 남로당에 가입,국방군으로 변신하고
국방군 남로당군사책으로 활동하다가 적발되어 동료 빨갱이 모조리 불고 혼자 살아남았죠~당시 군을 장악힐 만군,일본육사 출신들 구명운동으로 간신히~~
개일성이가 남침하면서 군에 복귀^~
그뒤 쿠테타로,독재자로 변신의 변신~~

유일한 치적이라는 경제기적~~
나름 인정되는 부분도 있지만,,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유무상 6억불~
베트남참전으로 직간접수십억불~~
지금 가치로 수천억불~


뭐 어쨋든, 거의 모든 지식인들 타도 박정희를 외쳤죠..
오죽하면 부산 마산에서 사태가 일어나고,탱크로 다밀어 버리자고 까지~

그뒤로 친일 수구언론의 집요한 박정희 영웅 만들기~~
그래야 친일이 합리화 되니까~
당시엔 온 국민의 타도대상
지금은 만고에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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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친일파라기보다는 .....

그냥 일제앞잡이라고 봅니다.

친일파는 일본과 친한 사람인데,

박정희는 단순히 일본과 친한 사이가 아니라 일왕에게 혈서까지 쓰고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스러웠거든요.

친일인명사전에 보면 다 나와있습니다.

저는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것보다

해방 후 한 짓거리가 진짜 인간말종이었다고 봅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사형구형 받고 빽으로 출소하여 결국 쿠데타 일으켜 민주헌정을 말살하고 부정부패, 정경유착, 공포정치, 부정선거, 고문살해 영구집권 ... 등등 온갖 악랄한 짓을 다 하다 부하로부터 총 맞고 뒈졌잖아요.

오죽했으면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중정부장에게 총 맞앗겟습니까.

한 마디로 인간말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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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매국노죠.
박정희 광신도들이 온갖 궤변으로 일본육사 졸업하고 만군 장교로 복무한 것을 일제와 무관한 것으로 억지를 부리지만 손으로 태양을 가리려는 가련한 시도입니다.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조국을 찾기위해 투쟁하고 있을때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에 서 있던 박정희가 매국노가 아니라는 주장은 이완용이 애국자라는 주장과 똑같은 것입니다.
박정희 광신도들의 억지가 눈물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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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창씨개명이 아닌 자발적으로 일본이름을 썼다는점. 만주군관학교 중국인 동기의 증언 .
대통령 당선 후 청와대에서 일본군복 복장에 군마를 타고 일본군가를 불렀다는 신문기사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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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1961년 군사 정변에서부터 1963년, 1971년 부정 선거 당선, 1972년 헌법 개헌, 1973년 김대중 납치까지 아주 많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박정희가 남긴 것은 썩은 대통령제, 세계 제일의 지역 감정,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 국민들의 전체주의 찬양 뿐입니다. 새마을 운동? 그것은 온 국민이 땀흘려 일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박정희보다 김대중이 훨씬 더 유명합니다. 또한 박근혜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독재 정치를 할 사람입니다. 박정희는 히틀러나 스탈린과 마찬가지인 희대의 독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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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면 안됩니다

역사가 실증하고,, 실제로 검증된 사실만을 게제 하여야 합니다

현세대의 진리는 명백하게 애매하고 허위가 분명한데

우리는 어찌 조작된 장막의 그늘에 머물려고 하나요?

 

다까끼마사오,,, 이름세탁을 시도 하지요, 조센징냄새를 제거 하기위해서

오까모도 미노루 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까지 합니다.

독제자가 된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앞에서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 저는 메이지 유신의 지사가 된 심정으로 조선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일본 넘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 속에서

한일협정이 진행됩니다.

더 말해야 합니까?

프랑스인들은 한국인들을 경멸합니다

매국노를 존경하는 미개인 이라구요!!

그들에겐 드골이라는 위대한 민족주의자가 친독행위자 10만여명을 처형하는등의 매국노 청산을 마무리 하면서

이렇게 외침니다.

" 향후 프랑스에서는 다시는 매국노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리승만의 정권욕에 편승하여 악질적인 친일분자들이

승승장구합니다. 해방이후 무려 150명이 넘는 친일분자들이 장관을 지냈습니다.

일제때 고등계형사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던 의열단의 김원봉 선생,, 그분은 해방후에 또다시 그 고등계 형사에게 피를 봅니다...

하늘을 보고 한탄 하시다가 급기야는 월북을 선택하고 맙니다..

이나라는 아직도 일제의 찌꺼기들이 정, 재, 관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나라를 떠나고 싶습니다.

 

 

 

그의 정책은 성공한 것도 있지만 실패한 것도 있습니다. 

물론 실패한 것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진실은 숨겨져 있고 신화[성공]만 남아있으니 국민들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죠.


박정희의 재임기가 평균 경제성장률은 9.3% 입니다.

그러나 한 해 최고 23%까지 치솟은 물가 상승률과 

엄청난 적자를 면치못했던 무역수지를 놓고 보면 결코 안정적인 경제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기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정부의 경제성장률은 결코 높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그는 많은 실책을 범했고 그 결과 경기가 빠르게 냉각되고 맙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그는 통화와 재정의 팽창으로 경기를 끌어 올립니다.

결과, 국제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끝내 외환위기가 일어났습니다.


그걸 벗어나기 위해 결국 한일협정을 준비하게 되었고

1965년, 국민들의 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결국 한일협정이 체결됩니다.

 그 과정에서 계엄령까지 선포했었죠...


그렇게까지 하며 한일협정을 체결한 것은 바닥을 드러낸 외환보유고 때문이었습니다.

한일협정의 내용에는 한국은 모든대일청구권을 포기하고 문화재 반환권까지 포기합니다.

개인의 청구권과 북한의 청구권까지 모두 없애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축하금(배상금이 아닙니다)과  경제개발자금 등으로 5억달러[현재 가치 약 10조원]의 원조를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굴욕협정'이었죠.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에 암살 당했던 그 해에도 경상적자는 무려41억 5천만 달러였습니다.

사상 최대의 적자였죠.


박정희가 성장에만 집착한 결과 현재의 대한민국이 탄생했습니다.

그가 바로 현 경제양극화의 씨앗인거죠.


그의 경제성장방식만 보더라도 기업과 재벌 중심으로 일방적 성장을 취한 것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성장을 취했으며

그는 성장에 크게 기여했던 노동자와 도시빈민에겐 철저하게 외면과 압박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이유는 뭘까요?


그 것은 당시 군사정부와 친정부 언론이 '날조'했던 자료를 현재까지 아무런 의심없이

수용해왔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탐구해야 할 학자들도 날조된 자료에 속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날조된 자료가 아닌 실제자료를 보고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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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그의 실체

 

 1.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혈서(최우수 제국군인)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자진해서 만주군관학교 생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입교 동기생으로 240중 조선인 12명. 15등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 덕에 영광의 얼굴로 [만주일보]에 실린다. 뿐만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나이도, 신원검증도, 사상검증의 장애물을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충성혈서는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 아니 일제를 감동 시켜 당시의 언론에(만주일보) 대서 특필 되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2.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js표 일본인 준비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한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주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 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이 만주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 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등 정부와 군의 요직에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중요 인물이 된다.  한 마디로 황군들이 나라 조지고 민족정기

좀 먹는 세력이 된 것이다. 

 

3. 완전한 일본인 -js표 일본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입학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 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키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js(japanese standard)표 [일제인]이라는 말인 것이다.

 

 4.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미안하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5.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6.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그러나, 변신과 배신의 천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한다. 그토록 노력하고 공들여 입은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박정희가 좌파가 되는 행동에 대하여 조갑제 등은 형(박상희)의 죽음과 연관 시킨다. 그 충격으로 좌파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주장이다. 박정희는 다만 유리한 상황에 편승한것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여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자기 혼자 살아 남자고 천명이 넘는 동지들을 저승길로 보내고 살아 남았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다. 어쩌면 한반도 남쪽을 반공으로 도배하는 길만이 자기의 과거를(황군/좌익 등) 은폐하고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7. 박정희의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하지만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리가 남아있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박정희의 창씨 개명은 여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사람보다 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 (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8.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이 기간동안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 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이상, 대충 줄인 내용입니다 ^^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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