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츠토무 : 일본인 오타쿠로서 4명의 여아를 살해한 
소아성애자 (일본에서는 오타쿠의 대부로 불림)


미야자키 츠토무의 사진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데
네이버 검색으로 오타쿠의 정의를 알아보던중에 
미야자키 츠토무 이야기가 정의글에 나와서 올려봅니다 


일본 최대의 애니메이션, 만화, 오타쿠 이벤트 photo






1. 오타구의 정의 



네이버 검색으로 알아본 오타쿠는 
한 분야에 마니아나 전문가 이상으로 빠져든 사람이고
특정 대중문화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었으나 

1989년 미야자키 츠토무의 여아
성범죄 사건이후 집에서 틀어박혀 사는 어둡고 사교성 없는 녀석들
이라는 뜻으로 변질되기 시작되었고 비평가들은 오타쿠라는 말을
일본의 하위 문화를 대표하는 전문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2. 일본의 오타쿠



일본은 오타쿠의 천국으로 일본교수 오카다 도시오 교수는
일본의 오타구들은 일본사회의 낙오자이며 일본이 자랑하는 집단주의가
만들어낸 기형아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일본경제의 몰락과 함께 매스컴의 호들갑과 돈벌이에 급급한
상업자본과의 결탁으로 급속히 퍼져나가 문화상품으로 자리잡아
기기묘묘한 성상품으로 둔갑하고 이제 일본은 못 말리는 
문화타락국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변태적인 욕구를 위한 각종 전문점이 생겨나 호황을 누리고
이런 돈벌이에 일본 대기업도 앞장서고 있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3. 대한민국의 오타쿠



어느 사회나 한가지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과 변태들은 있겠지만
그런것이 사회현상이나 문화가 되어서는 안되며 사회가 거기에 
열광하며 즐긴다는 것은 망조가 들린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돈벌이에 이용하여 이미 오타쿠
문화가 많이 들어와 있고 책도 많이 나와있습니다
우리 언론의 일본베끼기와 무분별한 일본문화 소개는 가장 큰 문제이고
일부기획사와 시청률에 목매는 tv방송국들과 합작하여 일본에서
유행하는 것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유행시키려하니 
정말 한심한 노릇입니다 



한국 티비에서도 유명연예인들이 일본에서 들어온 문화임을 자랑하며
만화나 영화를 예로 들며 전문가적 지식을 자랑하면서 이야기하는 
프로들이 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대다수 힘든가운데
이런 문화들이 유입될 가능성은 너무 크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중장년층의 이런 오타쿠 문화 찬양자들도 늘고 있는데 웃고 넘어갈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4. 일본관련 사이트에 어제 올라온글 



일본관련 사이트에 어제 올라온 글을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데
글 자체를 스샷해서 보여드리고 싶지만 오타쿠 관련글에 스샷해서 올리면
그 글을 쓰신 분에게 피해가 갈수 있어서 요약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1.......프로듀스 48을 보고 akb를 알게되었고 이렇게 글을 씁니다 
2.......한국 걸그룹은 실력중시이고 akb는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개개인의 매력이 있다
3.......일본의 초식남들은 어린소녀들을 보면서 연민을 느끼고
4.......그녀들이 잘되면 좋겠다는 바램이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5.......컨텐츠도 다양해서 악수회나 총선거처럼 다양하고 경제적인 효과도 대단하다
6.......일본의 양상을 한국이 따라가게 될것이라고 예상한다
7.......걸크러쉬같은 퍼포먼스 위주 컨셉은 수요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8.......한국에서 이런 형태의 걸그룹이 탄생될지가 기대가 된다 



일본관련 사이트에서 한분이 적은 글이고 스샷해서 올리지 못해 
제가 요약을 해보았는데 친일성향의 한국오타쿠분들중에 이런 성향을 
가진 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것은 아닌지 정말 걱정이 되어서
요약해 올려보았습니다 



일본의 하위문화를 대표하고 일본의 몰락을 상징하는 오타쿠 문화를 
찬양하는 글들을 우리는 이제 여러 사이트등에서 손쉽게 볼수 있는데 
일본자체내에서도 스스로를 욕하고 정화해야할 문화를 여겨지는 문화를
문화의 교류란 이름으로 당당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큰 걱정이 드는 부분입니다 





BBC 한국관련 기사 



지금 전세계는 한국문화의 슈퍼파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아시아를 점령한 상태에서 전세계를 아우르는 문화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친일성향 오타쿠들이 존재하지만 그런 일본인들 조차
아시아 문화 흐름의 중심지는 한국임을 자주 말하고 합니다 



덕후질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하는것은 고급화된 덕질이다 하면서
일본문화를 흉내내고 자국문화를 깍아내리며 일본의 오타쿠 문화가 
한국에 정착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보면서
지금도 역시 큰 걱정을 갖고 이글을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일본의 하위문화를 대표하고 일본문화의 몰락의 상징이 바로
오타쿠 문화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



 일본 오타쿠의 대부 엽기 여아 연쇄살인사건


연쇄여아살해범 미야자키 츠토무 사형집행된다는 뉴스

 

 

 

업로드된 날짜: 2008. 06. 17.

 

 

 

 일본 오타쿠의 대부 엽기 여아 연쇄살인사건

 

 

여아 연쇄 살해마 미야자키 츠토무 (1962년 8월 21일 - 2008년 6월 16일)

 

(소녀들의) 몸을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사체는 썩어버리지만 비디오라면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지.

 

1988년에 일어난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의 범인이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가벼운 장애를 가져, 집에 틀어박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사회로부터 떨어져 살았던 인물이다.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은 그 엽기성, 이상성으로도 유명하다.

성인여성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어서 유치원에 다닐 정도의 어린여자아이 4명을 유괴, 살해하고 실제로 그 사체를 먹음으로써 열등감을 해결하려고 했던 검정 뿔테 안경의, 손에 장애를 가진 20대 초반의 부모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는 반대로 힘없는 할아버지와 자신을 동일화시켰던 청년.

 

홈 비디오나 로리콘계 비디오(어린 여자아이를 상대로한 성인물) 매니아로, 공개 된 그의 방 모습 등에서 '오타쿠'의 범죄로서 크게 파문을 일으켰다.

 

 

 

미야자키 츠토무의 방은 성인물 비디오테이프가 6천 개나 있었고, 만화와 잡지로 파묻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방에서 발견된 수천개에 이르는 특촬영화 (울트라맨, 고지라 등으로 대표되는)와, 로리에로만화 및 아동성인물, 그리고 소녀들을 죽인후 촬영한 사체의 비디오는 그당시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오타쿠>라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으로 일반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히게 되었다고한다

 

 

<사건 개요>

 

1988년 8월 22일, 미야자키는 사이타마현 이루마시에서 4세의 여자어린이 a양를 차로 유괴, 살해했다.

사후, 그는 비디오 카메라로 a양의 성기에 장난하는 모습을 촬영하였다.

 

1988년 10월 3일, 사이타마현 한노우시에서 7세의 여자어린이 b양를 차로 유괴, 살해했다.

살해한 후, 시체의 옷을 벗겨 성기에 장난을 한다.

 

1988년 12월 9일, 사이타마현 카와고에시에서 4세의 여자어린이 c양를 차로 유괴.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는 등 유린한 후, 살해한다.

 

1989년 2월, a양의 집에 골판지 박스가 도착한다. 안에는 a양의 치아, 뼈, 그리고 "a양, 골, 소, 증명, 감정"이라고 쓰여진 문서를 넣어서 보낸다. 그 후, '이마다 이사무자'라는 이름으로 범행 성명문, 고백문을 매스컴에 보낸다.

 

1989년 6월 6일, 토쿄도 코토구에서 5세의 여자어린이 d양을 차로 유괴, 살해했다.

a양과 같이, 비디오 카메라로 d양을 유린하는 장면을 촬영한다.

 

1989년 7월 23일, 여자어린이에게 장난을 하려고 했으나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그 이전의 사건에 대해 모두 자백했기 때문에, 1989년 8월 11일, '연속 유아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서 체포 된다.

 이 사건은 사건의 잔인성이나 엽기성만으로도 굉장하지만, 그것이 한층 더 굉장한 인상을 주는데는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어린 여자아이가 목적이었던 일, 성기에 장난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던 것'4명 중 한 여자어린이의 양손을 먹었다'라고 자백한 것, 미야자키의 방이 공개되었을 때, 그 모습이 특수 촬영이나 애니메이션, '기니핏그'와 같은 공포영화 등의 비디오 테잎이나 만화로 가득 차 있었던 것, 최근 이상 사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화제로 떠오르는 '정신감정'이 이 때 세상에 클로즈업 된 것, 등이다.

 

이 사건이 세상에게 준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워낙 파문이 컸던 사건이라 친아버지가 지쳤다는 유서를 남기고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했는데, 이에 대한 미야자키 츠토무의 코멘트는 "아버지가 그렇게 되어 속 시원합니다" 였다.

 

사형이 확정된 후로는 모 출판사에 300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내서, 교수형은 인권을 침해한다는 둥, 사형 집행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죄나 반성을 할 수가 없다는 둥 「무죄입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등을 주장, 피해자나 유족에게는 끝까지 사죄하지 않는등 여러가지로 뻔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대단한 일본~ 그 사이에 돈 좀 벌어볼려고 이 사건을 만화로 출판

 

 

 

 

미야자키 츠토무 출생과 성장 그리고 사형 집행까지

 

도쿄도 니시타마군 이츠카이치쵸에 있는 현지 신문 회사를 경영하는 유복한 일가의 장남으로 출생.

 

양친은 맞벌이로 바빴기 때문에, 미야자키가 출생한지 얼마 안되어 아이를 돌보는 남성을 고용한다.

어린 시절에는 거의 이 남성과 조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다. 미야자키가는 증조부는 촌(村)회 의원, 조부는 쵸(町)회 의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그 지역의 명사였다.

 

가족은 조부, 조모, 양친, 여동생 2명으로 7명. 어릴 때부터 손바닥을 위로 향할 수 없는 '양측 선천성 요척골 유합증(両側先天性橈尺骨癒合症)'이란 당시의 일본에 150명 정도 밖에 사례가 없는 드문 신체 장애가 있었다.

 

초등 학교 시절에는 '괴수 박사'라고 불릴만큼 괴수에 열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장기부에 소속, 질경우에는 다양한 공략책을 읽어서 졌던 상대에게 반드시 이길만큼 승리에 집착했다. 손의 장애를 신경쓰고 있어서 자택에서 편도로 2시간이나 걸리는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동급생은 어둡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년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본인은 메이지대학으로 추천 입학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고교시절에 계속 성적이 떨어져서 희망을 이룰 수 없었다.

 

고교 졸업 후인

1981년, 도쿄코게이대학 단기대학부 화상 기술과에 진학. 퍼즐에 열중해서, 자작 퍼즐을 전문지에 투고하거나 잡지의 퍼즐 회답자로 잡지에 이름이 게재되기도 했다. 배우인 카와사키 마요(川﨑麻世)가 단기대학의 동급생이었지만, 미야자키의 체포시 인터뷰에서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으로, 80명 정도의 소수 인원 클래스였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고), 친구에게 물어봐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라고 할만큼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1983년 4월, 단기대학졸업 후에는 숙부의 소개로 코다이라시의 인쇄 회사에 취직해서 인쇄기 오퍼레이터로 근무. 한 동료는 '근무 태도가 매우 나쁘고, 평판도 매우 나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1986년 3월에 해고.

양친이 가업을 돕도록 몇 번이나 이야기 했지만, 자기 방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수개월동안 계속한다. 9월 경부터 광고 원고를 받으러 가는 정도의 간단한 심부름으로 가업을 돕는다. 이 무렵부터 애니메이션 동인지를 발행하지만, 동료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1회만에 발행이 끝난버린다.

 

그 후에는 수많은 비디오 서클에 가입해서, 전국 각지의 회원이 녹화한 애니메이션이나 특촬(특수촬영)프로그램의 비디오를 더빙 교환, 콜렉션을 하지만, 대부분의 테잎은 자신이 감상하는 일이 없었다.

 

비디오 서클에서는 다른 회원에게 무리한 녹화나 더빙 주문을 했기 때문에, 미움받고 있었다.

 

 

 

 

체포 후 가택 수색에서 6000개에 가까운 비디오 테잎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된다.

 

1988년 5월, 조부가 사망.

1988년 8월 22일에 제 1 범행을 일으킨다.

1989년 3월에는 하루미 코믹마켓에 만화 작품을 출품했다.

 

사건 후

 

1989년 7월 23일, 외설사건을 일으키려 하던 것을 피해자의 부친에 의해 붙잡혀 미야자키는 강제 외설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1989년 8월 24일, 도쿄 지검의 총무부 진단실에서 간이 정신감정을 받는다. 정신 분열병(당시의 호칭)의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현시점에서는 인격장애의 범위에 머문다고 판단, 검찰은 기소를 단행한다. 첫공판에서 '전체적으로 깨지않는 꿈을 꾸고 일어났다고 할까, 꿈을 꾸고 있었다고 할까...'라고 죄상 인부(죄상의 인정여부를 묻는 절차)에서 말했다.

  

1992년 3월 31일 정신감정서가 제출되었고 인격장애로 보여졌다. 실재로 성적 도착은 인격장애 환자에게서 잘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조부의 뼈를 먹은 증언에 대한 변호측의 증거제시가 있었지만, 검찰측은 그것만으로는 확증이 될 수 없다고 반론했다.

 

1994년 11월 30일에 제 2회 감정서가 제출된다.

1명은 통합 실조증, 2명이 해리성 동일성 장애의 감정을 냈다.

 

1997년 4월 14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사형 판결. 책임 능력에 관해서는, 체포시 그에게 그러한 다중 인격이나 통합 실조증을 의심하게 하는 비정상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고, 체포에 의한 구금 반응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는 이유로 제 2회 감정은 채용되지 않았고, 책임 능력은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고 판결되었다.

 

당일 공소.

2001년 6월 28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1심 지지. 공소 기각 판결.

2001년 7월 10일, 상고.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가 변호측의 상고를 기각. 변호측이 판결 정정을 요구했지만,

2008년 6월 17일, 도쿄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된다.

 

잡지 '츠쿠루(創)'의 시노다 히로유키(篠田博之) 편집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의 현행 사형 방법인 교수형을 비판하고, 약물 주사에 의한 사형 도입을 호소하기도 한다. 편집부로 보낸 편지는 약 300통, 내용은 구치소에서 읽은 만화의 타이틀을 나열하기만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인에게도 총 2000통 가까운 편지를 구치소내에서 보냈다.

또, 사형 판결이 결정된 후에는 독방에서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감상하는 것이 허가되었다.

(죽을때까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원없이 보다가 뒤지라고 그런건가?)

 

동기

 

사건의 기이함으로 인해 다양한 억측이 난무하고, 미야자키 자신도 요령부득(要領不得)의 진술을 반복하고 있어서 재판에서도 특정한 동기는 밝히지 못했다.

 

감정을 담당한 의사들에 의하면, 그는 본질적으로 소아성애자(小児性愛者)(페도필리아: 어린아이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하는 성도착증)가 아닌, 어디까지나 대체적(代替的)으로 여아를 노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인을 포기하고 여아를 대체물로 한 것 같고,

 

소아성애나 사체성애(死体性愛) 등의 경향은 볼 수 없습니다' (제 1차 정신감정의 법정 증언) '유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성도착은 인정되지 않고... 유아를 대상으로 한 것은 대체이다'(간이 정신 감정)

 

사형 집행

 

2008년 6월 17일 오전에 하토야마 쿠니오(鳩山邦夫) 법무장관의 명령으로 미야자키의 사형이 집행된다.

 

 

 

 

 

사형 집행 전

 

범행 동기는 미해명인 채로 정신감정도 계속 진행중인 상황이었다. (과거 10년간) 사형 확정으로부터 사형 집행까지 평균 약 8년이었지만, 사형 확정으로부터 2년 4개월의 스피드 집행이 되었다.

 

 

 

저 서

여아 연쇄살인마 미야자키 츠토무는 사형전까지 두권의 책을 출간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