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이 총살한 ‘독립운동가 최능진’, 64년 만에 ‘무죄’

 

 

 

백범과 함께 친일파 청산·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 활동

한국전쟁 때 정전운동 벌이다 ‘이적죄’ 몰려 군법회의서 사형
재판부 “허망하게 생명 빼앗긴 고인에게 안타까운 마음 표해”
최능진
최능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한국전쟁 와중에 부역자란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 최능진씨가 64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로 공식 인정된 셈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8부(재판장 최창영)는 27일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1951년 2월 사형당한 최씨의 재심에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1899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최씨는 일제강점기에 안창호의 흥사단에서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해방 뒤 월남해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이 됐으나 친일파 출신 경찰관들의 축출을 요구하다 자리를 잃었다. 김구와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활동을 했고,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동대문에서 이승만에 맞서 출마했으나 입후보를 취소당했다. 그해 정부 수립 직후 반란을 꾀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 발발로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한 직후 풀려나 정전·평화운동을 벌였고,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대적 부역자 색출·처벌을 주도한 것은 일본 관동군 헌병 오장(하사) 출신으로 악명을 떨치던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최씨가 사실관계가 잘못된 판결로 총살당했다”며 진실규명 결정과 함께 재심을 권고했다.

재심 재판부는 “최씨가 주도한 ‘즉시 정전·평화통일 운동’은 김일성 등에게 전쟁을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민족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어 “특히 북쪽이 ‘이승만 타도 대회’를 함께 개최하라고 강요하면서 시비가 붙었고, 그 과정에서 체포됐다가 풀려난 뒤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한 1950년 9월28일 무렵까지 숨어서 지낸 사실이 인정된다”고 했다. 따라서 ‘적을 구원·보호’하는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반일이나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 최씨의 행적을 종합해 평가할 필요도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선고를 마치며 “우리 사법체계가 미처 정착·성숙되지 못한 혼란기에 6·25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군사법원의 그릇된 공권력 행사로 허망하게 생명을 빼앗긴 고인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표한다”고 밝혔다. “재심 판결이 유명을 달리한 고인의 불명예를 회복하고 과거사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도 했다.

최씨는 2013년 별세한 최필립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부친이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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